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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클라이밍

한국의 벽

 

고창 선운산 속살바위 투구바위

거의 완벽

 

· 민은주 기자  사진 · 주민욱 객원기자

 

 

 

완벽이라 일컫는다. 선운산, 그중에서도 질박한 화강암벽 속살바위와 투구바위를. 5.7급부터 5.14급까지 100여 개 루트가 개척된 이 암장은 지난 24년 동안 가장 치열하고 첨예한 스포츠클라이밍 아레나였다. 찬란한 고통과 참담한 기쁨이 난무했고, 무수한 클라이머들의 피와 땀과 혼이 이 벽에 깃들었다. 무정세월은 가장 용맹한 전사의 귀밑머리도 희게 물들였지만 선운산 암벽은 여전히 새파랗게 젊다. 환갑을 바라보는 개척자가 새로운 등반선을 고민하는 사이, 눈물도 웃음도 많은 어린 아이들은 긴박한 오버행을 가뿐히 올라선다. 지나간 시절과 다가올 시간이 공존하는 선운산에서 대한민국 클라이머들의 오래된 미래를 만난다.

 

현장 스케치, 클라이머들이 사는 세상

희붐한 연둣빛 사이로 흘끗, 속살이 보인다. 1994년까지 무명절벽에 불과했던 이 바위는 클라이머들이 제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 어느 시구마냥 비로소 ‘그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의미를 획득했다. 오르막을 따라 길쭉하게 이어진 속살바위에는 겹겹의 로프마다 기합과 비명이 엇갈린다. 고개 너머 투구바위에는 카랑카랑 돌개바람만큼 새로운 등반선에 대한 열망이 거칠게 불고 있다. 2018년 어느 봄날, 속살바위부터 투구바위까지 선운산 한 바퀴를 빙 돌아 하루치 풍경을 스케치한다.

속살바위 가장 아랫단에서 의외의 얼굴을 만난다. 암벽, 빙벽, 고산거벽, 모든 등반분야를 섭렵한 산악계의 헤라클레스, 정승권 교장이다. “2~3년에 한 번 정도? 자주 오진 못하지만 선운산, 정말 좋아해요.” 등산학교 회원들과 모처럼 선운산 암장을 찾았다는 그는 교육을 위해 상대적으로 쉬운 루트들이 위치한 속살바위 하단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워서 왔다”며 흰 벽을 쓰다듬는 정 교장의 눈매가 우련 가늘어진다.

한 단을 오르면 ‘노력하는 사람들(5.12b)’, 물리적으로 이 벽과 가장 가까이 사는 이가 확보를 보고 있다. 젊은 시절을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정장희씨는 지난 2005년 돌연 생활을 정리하고 선운산으로 낙향했다. 선운사 일주문 내 호젓하고 아담한 돌집을 지날 때마다 그가 몸살 나게 부러운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해요?” 물색없는 질문에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맑게 웃는다. “바위 때문에, 만날 등반하고 싶어서 내려왔죠. 금토일은 거의 벽 앞에 있어요. 5.14급 루트를 몇 개 해보는 게 여전한 꿈입니다.”

‘새내기(5.11b)’ 앞은 언제나 시끌벅적, 이날도 줄줄이 순서를 기다리는 암벽화들이 속살바위 최고인기루트임을 증명한다. 후루룩 새내기 등반을 마치고 하강하는 이는 본지 등반취재에 여러 번 동행했던 최소열(벽오동 암벽회)씨다. 반가운 얼굴은 그만이 아니니, 남원 상사바위 개척자인 최윤오(남원클라이머스)씨가 주(5.12a)에서 확보를 보는 중이고 목포 산체공암장 개척자인 목포클라이밍클럽의 백현규 회장과 당시 취재등반을 함께 했던 이양구(목포클라이밍클럽)씨도 ‘때로는 힘들지만’, ‘버디’ 등에 퀵드로를 걸어놓고 등반이 한창이다. 스포츠클라이밍은 끝없이 정점을 추구하는 행위, 신명나게 덤벼들 전장이 필요하다. 하여 전국 각지 명망 있는 클라이머들과 이름 없는 고수들이 모두 선운산에 모여든다.

 

선운산, 완성된 벽의 여백을 찾아서

“이미 완성된 암장입니다.” ‘스피드(5.13a)’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내려온 김종오(손정준클라이밍센터)씨가 선운산 암장을 평한다. 2017년 선운산 고난이도 루트들을 전부 완등한 그는 5.15급 등반을 목표로 해외암장을 방문하고 거벽자유등반에도 도전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계속 확장하고 있다. “투구바위에 아직 프로젝트 루트 몇 개가 남아있다고 압니다. 개척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완등이 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에는 일반 클라이머들에게 오픈해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마땅히 목표로 두고 집중할 루트가 없는 김종오씨는 이제 후배를 위해 선운산 암장을 찾는다. 등반경력 2년 반 즈음인 윤지원(게이트원클라이밍센터)씨는 전날 ‘퍼즐(5.12b)’를 완등하고 이제 ‘무지개(5.12c)’ 동작풀이를 시작한다. 먼 길을 가야할 후배를 위해 김종오씨가 홀드마다 꼼꼼하게 솔질을 한다.

“더럽게 길게 떨어트리네!”, “야, 너 내려와! 누구 허락 받고 남의 자일을 쓰냐?” 활자로만 보면 험악하기 짝이 없는 대화 속에 웃음과 농담이 그득하다. 5.13급 루트들이 밀집한 속살바위 상단에는 주말마다 벽 앞으로 귀소하는, 서로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 모인다. “선운산은 특별해요. 암질이 독특하고 루트마다 개성이 있지요.” “과거에 개척된 암장이라 간혹 치핑홀드가 있긴 하지만, 국내에 선운산을 대체할 바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위야 늘 그대로지만 사람들은 바뀌니까, 선운산은 항상 새롭습니다.” “전국 클라이머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니까, 여기 오면 그리운 얼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지요.” 한 마디 한 마디에 선운산과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눅진하게 녹아난다.

강희윤씨는 선운산 암장의 완결을 거부한다. 1994년부터 투구바위 정면 벽에 수십 개의 등반선을 그려낸 그는 아직도 이 벽의 극한은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현재 선운산 투구바위에는 강희윤씨가 개척한 ‘겨울람보(5.13d)’, ‘한여름밤(5.13d)’와 황평주씨가 개척한 ‘조커(5.14a/b)’, 권영혜씨가 개척한 ‘하드코어(5.14a)’, 손상원씨가 개척한 ‘오토매틱(5.14a)’과 ‘파워파워(5.14b/c)’가 최고난이도 루트로 꼽힌다. 강희윤씨는 여기에 ‘겨울람보Ⅱ(5.14c?)’, ‘오토매틱Ⅱ(5.14c?)’, ‘한여름밤Ⅱ,Ⅲ(5.14c이상, 5.15?)’ 등을 추가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모두 기존 루트의 다이렉트나 베리에이션 버전입니다. 솔직히 좀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요. 그렇다고 선운산 프로젝트를 끝낸 사람들이 죄다 해외로 나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후배들이 놀 수 있는 새로운 루트를 마련해주고 싶습니다.”

고난이도 루트에 대한 강희윤씨의 의지는 확고하다. 등반은 한계를 돌파하는 것, 그의 신념을 지지하는 후배들도 투구바위에 모여든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유일한 5/15급 클라이머인 손상원(손상원클라이밍센터)씨와 조성호(타이거볼더)씨, 이민영(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군 등이 ‘강희윤 프로젝트’를 천명하고 나선다. 여기에 손상원씨는 본인이 개척, 초등한 ‘파워파워’를 가열차게 새로운 방식으로 등반 중이다. 크럭스 구간에서 니바를 쓰지 않고 직상하는 다이렉트 버전이다. 홀드를 고르고 동작을 가다듬으며 신중한 탐색전을 펼친 그는 “가능할 것 같아요, 5.14c 정도?”라며 ‘파워파워Ⅱ’의 탄생을 알린다. 새로운 등반에 대한 간절함이 거의 완벽한 선운산에서 한 치의 여백을 찾아낸다.

 

우리 모두를 위한 오래된 미래

봄볕보다 밝다. 열손가락을 훌쩍 넘는 청소년 클라이머들이 각자 목표하는 바윗길을 향해 선운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참새처럼 명랑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2~30대 젊은 클라이머가 부쩍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청춘의 탄력과 실내암장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온사이트부터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등반을 탐닉한다. “젊은 층이 늘면서 분위기도 화사해졌어요.”, “자연스럽게 건강한 등반문화가 형성되는 것 같아요.” 선운산 세대교체의 바람은 호시절 춘풍처럼 따스하고 보드랍다.

봄바람이 아무리 감미로워도 선운산은 아직 클라이머들의 도원경이 아니다. 지난 2014년 12월, 선운산 속살바위 앞에는 ‘자연공원법 제 27조 제1항 및 제 28조 1항에 의거해’ 선운산 내 암벽등반을 금지한다는 안내철판이 박혔다. 지역 클라이머들이 선운산도립공원 측과 끈질기게 협의해 암장을 일방적으로 폐쇄하는 상황은 막아냈지만, 여전히 선운산에서 암벽등반은 허가받지 못한 행위다. 등반가들이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언제든지 다시 폐쇄될 수 있다. 그러니 고정 퀵드로를 설치하지 말고, 장비 대포를 피하고, 쓰레기 투기와 화기 사용을 금하는 것은 지난 24년 동안 대한민국 스포츠클라이밍을 견인해온 고맙고 소중한 선운산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다.

“으아!” 벽 한가운데서 울음이 터진다. 새순처럼 앳된 클라이머다. 울음의 근원이 고통인지, 공포인지, 분함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아이를 달래주지 않는다. 한참동안 바위에 매달려 눈물을 쏟은 클라이머는 손발을 툭툭 털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여리고 용맹한 등 뒤로 햇살이 쏟아진다. 미래가 있기에 선운산은 거의,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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