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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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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단천교~청량산 조망대~학소대~농암종택~고산정

 

예던길은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을 오갔던 낙동강변의 오솔길이다.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칭했던 퇴계 선생은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란 시를 통해 ‘책을 읽음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다. ‘퇴계 오솔길’ ‘녀던길’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낙동강이 빚은 그림 같은 절경 속을 거닐면서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농암종택, 고산정 등 퇴계 선생과 얽힌 다양한 문화유적도 즐길 수 있다.

 

글 · 강윤성 편집장  사진 · 정종원 기자

 

 

안개 낀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졸

새벽여명 걷히고 붉은해 솟아오르려 하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님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64세 때 친구 이문량(1498~1581) 일행과 안동 도산면 원천리 예던길에서 만나 청량산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문량이 약속 장소에 늦자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라는 시를 읊으며 먼저 출발했다.

예던길은 퇴계 선생이 한 폭의 수채화로 묘사한 것처럼 그림 같은 길이다. 퇴계 선생은 초년 시절이나 낙향한 이후에도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에 이르는 낙동강변을 따라 예던길을 걸었다.

청량산은 퇴계 선생을 기른 곳이고, 마음의 이상향이었다. 형인 온계 이해와 함께 15세 때 처음 청량산을 찾아 퇴계 선생의 숙부로 호조, 형조 참판과 관찰사를 지낸 송재 이우를 모시고 공부를 하였으며, 64세까지 수차례에 걸쳐 청량산에 머물렀다.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청량산을 지극히 사랑했다.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향해 걷던 녀던길

퇴계 선생이 머물던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는 낙동강변을 따라 16km 정도. 퇴계 선생은 천사, 단사, 가송, 너분들로 이어진 길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곤 했다. 청담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강이 된다”고 했다. 낙동강은 발원지인 태백에서 천과 다를 바 없이 흐르다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넓고 깊은 강의 모습을 갖춘다. 특히 도산서원에 이르는 동안 일곱 번이나 굽이치며 천하 절경을 빚어낸다. 그곳에 퇴계 선생이 살았다.

“이 길은 시심의 길이기도 합니다. 단천교에서 고산정까지 이어지는 예던길을 걸으면서 백운동, 미천장담, 경암, 한속담, 월명담, 고산정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퇴계 선생의 한시와 경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예던길의 시작 지점인 단천교를 지나 청량산 조망대에 올라서자 이동구씨(도산서원 전 별유사)가 굽이도는 낙동강 위로 청량산 능선이 산너울을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손짓을 한다. “퇴계 선생이 수백 년 전에 말씀하신 대로 하나의 그림이 아니냐”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경외감과 흐뭇함이 묻어난다. 청량산 조망대 부근에는 퇴계 선생의 시조를 담은 화강암 시비와 안내석이 여러 곳에 놓여있다.

“전망대에서 왼쪽의 좁은 숲길로 내려서면 퇴계 선생이 낙동강변을 따라 걷던 옛 오솔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사유지라 흔적을 남기지 말고 조용히 다녀오세요. 농암종택에서 뵙겠습니다.”

 

낙동강이 빚은 생명의 숲길

퇴계 선생의 흔적을 좇아 숲에 내려선다. 거미줄이 겹겹이 쳐진 울창한 숲이다. 숲을 뒤덮은 5월의 신록이 초록빛을 아낌없이 내뿜는다. 나무와 나무가 서로 부둥켜 어우러지고, 온갖 풀씨들이 나무 사이를 유영한다. 풀벌레 소리 또한 합창을 한다.

숲을 관통하자 낙동강의 너른 물결과 어우러진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얀 뭉게구름 떠다니는 푸른 하늘 아래 서 있다. 강변 옆의 널찍한 묵밭에는 유채꽃을 닮은 샛노란 겨자꽃이 만발해 있다. 유채꽃처럼 너무 화사하지 않아서 더 정감이 가는 꽃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축복하며 기쁨을 노래하는 자연의 황홀한 세상이다.

강변의 둑방에 올라선다. 한창 꽃놀이에 나선 취재진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청량산 산 그림자 또한 춤을 춘다.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풍류를 즐기던 퇴계 선생의 보폭에 맞추며 낙동강을 거스른다.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향해 거닐었던 이 예던길은 ‘녀던길’이라는 옛말의 현대어 표기다. ‘녀던’은 ‘가던’, ‘행하던’ ‘바른’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즉, ‘학문 수양에 힘쓰던 길’이란 뜻이다. 예던길의 시작 지점인 안동시 도산면 단천교 출발 지점 숲에 ‘녀던길’이란 표지석이 서 있다. 퇴계 선생이 지은 〈도산십이곡〉의 후6곡 제3수 녀던길에서 따온 말이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어

고인을 못 뵈어도 녀던길 앞에 있네

녀던길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쩔 고

 

퇴계 이황이 여러 차례 거닐었고, 그 영향으로 후대의 문인과 묵객들도 자주 찾던 이 길은 처음 ‘퇴계의 오솔길’로 지정됐지만 낙동강변 일부 지역이 사유지인 탓에 현재의 예던길은 청량산 조망대에서 건지산을 넘어 능선을 타고 농암종택으로 코스가 바뀌었다. 산길이든 들길이든 길이란 무릇 자연 그대로의 가장 유순한 곳을 따르는 법. 결국 옛길은 퇴색되고 새 길은 명분을 얻지 못하고 있다. 취재진은 이동구씨의 권유도 있었지만 퇴계 선생이 거닐었던 똑같은 길을 유람하기 위해 강변으로 내려섰던 것이다.

건지산 삽재를 오르는 초입에 도착하니 강변 바닥의 평탄한 암반층에 공룡발자국이 선명하다. 현재와 조선시대, 선사시대를 오가는 시간여행을 한다. 강의 암반을 징검다리 삼아 숲길에 들어서니 바위 아래 돌무더기가 쌓인 풍혈이 나온다. 여름이면 동굴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고 한다. 풍혈 앞 네모반듯한 마당바위에 올라서니 낙동강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퇴계 선생이 46세(1546) 되던 해 가을에 혼자서 낙동강변을 거닐면서 경승지를 만날 때마다 지었던 한시 ‘경암(景巖)’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천년 동안 물결친들 없어짐이 있겠나

물결 속 높이 솟아 기세도 웅장하네

인생의 발자취는 물에 뜬 부평초

뉘라서 이렇게 굳게 서서 견디리오

 

경암을 지나면 낙동강이 굽이지며 거칠어진다. 그 휘감아 도는 곳에 병풍바위인 학소대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불끈 솟아있다. 예전에 학들이 둥지를 틀고 서식했을 만한 풍광이다. 한눈에 봐도 시인묵객들이 강 건너서 음풍영월했을 터다. 학소대 아래는 맑고 깊은 강물이 휘몰아친다. 경암에서 이곳에 이르는 급류 지역을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 부른다.

 

어릴 때 여기서 낚시하던 일 생각나

서른 해 티끌세상에서 자연을 저버렸네

강산이 옛 얼굴을 나는 아직 알건마는

저 강산이 늙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풍광을 품은 농암종택

학소대 아래의 비좁은 숲길을 빠져나가자 하늘이 다시 트인다. 강이 곧장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애일당(愛日堂)이 자리하고 있다. 애일당은 농암 이현보가 연로한 부친과 숙부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 옆에 자리한 분강서원은 광해군 때(1613) 농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뜻으로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던 곳인데, 숙종 때(1700) 서원이 되었다. 또한 서원 오른쪽에는 농암종택이 자리한다. 강물이 삼면을 감싸고도는 곳에 자리한, 천혜의 자연 풍광을 품은 곳이다.

농암종택은 〈어부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현재 직계 자손들이 650여 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1370년에 지어진 농암종택은 원래 도산서원 인근 분천동에 자리했는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종택과 분강서원, 애일당, 사당, 긍구당 등 농암 관련 문화재를 이곳 가송리에 이전, 한 곳에 복원해 놨다. 강 건너편으로 벽력암, 한속담, 월영담 등의 절경이 마주하고, 주변으로 푸른 산등성이가 춤을 추듯 흐르며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이현보의 <어부가> 제2수의 배경이 된 낙동강을 끼고 있는 부내마을 또한 현재의 이곳과 다를 바 없이 수려했을 터다.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열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려 있었던가.

강호에 달 밝아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농암 이현보는 퇴계의 숙부인 이우와 친구 사이로 두 사람은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퇴계와 농암의 둘째 아들 이문량도 친구 사이였다. 농암은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나 퇴계가 살던 온계 옆 동네인 부내(汾川)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강호진락(江湖眞樂)을 즐겼다. 퇴계의 시와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스레 농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퇴계는 농암이 호조참판 자리를 물러날 때 “지금 사람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른다”며 높이 평가하며 전별시를 지어 헌정하기도 했다. 퇴계는 농암과 교류하며 많은 편지와 시를 주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달빛이 흐르는 밤에 분강(부내 앞 낙동강) 한가운데 있는 ‘자리바위’에 촛불을 켜고 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농암과 퇴계가 술잔처럼 주고받은 그 풍류의 결과물이 바로 <어부가>와 <도산12곡>이다. 농암이 임종을 앞두고 퇴계에게 “강산 전체를 주었다”라고 한 말은 본인의 강호가도(江湖歌道) 문학을 퇴계에게 물려주었음을 뜻한다.

농암종택은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이뤄진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돼 있다. 종택의 사랑마루에는 적선(積善)이란 선조 어필이 걸려있다. 선조 임금이 “너의 집은 적선지가 아니냐” 하며 즉석에서 두 글자를 써서 농암 가문에 하사했다고 한다. 특히 긍구당(肯構堂)은 1370년 전후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이 지은 건물로서, 농암이 중수하여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는 뜻을 담아 긍구당이라 칭했다.

 

강을 두고 마주한 외로운 고산과 고산정

농암종택에서 청량산을 향해 강변길을 걷는다. 서남쪽으로 거스르던 강은 한 굽이를 크게 돌아 다시 남서쪽으로 거슬러 오른다. 물줄기가 일직선이 되는 곳에 놓인 다리를 건너 강변을 400미터 오르니, 가송협 절벽 아래 낙동강을 끼고 자리한 고산정(孤山亭)이 고즈넉하다. 퇴계 선생의 제자이자 조선 중기 좌승지를 지낸 금난수의 정자로, 퇴계 선생이 걷던 예던길을 따르다가 주변 풍광에 도취해 고산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 또한 퇴계 선생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며 시와 문학을 공부했던 곳이다. 고산정이란 이름은 강 건너에 마주하며 홀로 솟은 바위산 고산(孤山)에서 따왔다. 고산정과 가송협은 안동 팔경의 한 곳이자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퇴계 선생이 풍류를 즐겼을 만한 수려한 풍광이다. 그의 호 조차 ‘산골짜기(시냇물)로 물러나다’는 뜻의 퇴계(退溪)가 아닌가. 수없이 물러남을 실천한 퇴계 선생이 거듭 찾은 곳은 번잡하거나 화려한 곳이 아닌 낙동강변의 한적한 산간마을이었다. 풍류가 흐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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