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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②

 

자문밖의

산천이

 수려하여라

세검정과 백석동천을 찾아서

 

글 · 심산(한국산서회)  사진 · 서영우(한국산서회)

 

 

제2회 인문산행의 집결지는 세검정이다. 2018년 4월 7일(토), 청명도 한식도 모두 지나 절기상으로는 완연한 봄이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아침 바람이 차다. 일찌감치 세검정에 모인 주최 측은 집결지를 코앞에 두고도 못 찾아 전화를 걸어오는 일반참가자들을 응대하기에 바쁘다. 조선시대에 가장 유명한 유상처들 중의 하나가 바로 세검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 그 위로 다리와 도로가 놓이고 차들이 씽씽 달리니, 승용차나 버스를 타고 지나치기만 했을 뿐 실제로 이곳에 와본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이 창의문이고, 자하문은 창의문의 또 다른 이름인데, 우리는 오늘 자하문 밖의 승경과 유적들을 찾아 인문산행을 떠난다. 세속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자하문 밖’을 줄여 그냥 ‘자문밖’이라 불러왔다. 한양도성의 북쪽이요 북한산성의 남쪽이어서 두 성(城) 사이에 위치한 공간인 까닭에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맑은 계곡이 휘돌아나가는 천혜의 땅이다. 오늘날 부암동 신영동 평창동 등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을 형성하고 있는 이 지역의 역사는 꽤나 유구하고 파란만장하다.

 

그들은 과연 세검정에 모여 칼을 씻었을까

세검정(洗劍亭)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속설은 “인조반정(1623)의 무리들이 거사를 성공시킨 후 이곳에 모여 칼을 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기록이다. 인조반정의 성공은 곧 노론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후대의 자손들이 선대의 반정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키기 위하여 덧붙인 일종의 ‘수사학적 표현’일 가능성이 짙다.

현재의 세검정이 들어서 있는 지역은 인조반정 훨씬 이전부터 명승지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초기의 성현(1439~1504)은 자신의 문집 [용재총화]에 이렇게 썼다. “성 밖의 놀만한 곳으로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물은 맑고 돌은 희어 선경이 완연하니, 와서 노니는 양반들이 끊이지 않는다.”

장의사란 무엇이고 어디에 있었는가? 장의사란 7세기 중엽 삼국통일전쟁이 한창일 때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인데, 현재의 세검정초등학교 운동장 한 켠에 당간지주만을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장의사 앞 시내’란 바로 현재의 세검정이 들어서 있는 계곡을 뜻한다. 장의사는 조선 초기 왕실의 기도처였고, 사가독서(賜暇讀書, 왕이 젊은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글공부에 전념토록 한 제도)의 현장이기도 했다.

장의사와 그 앞의 계곡에 일대풍파를 몰고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연산군이다. 그는 장의사를 폐사시켜 중들을 쫓아내고, 그 아래에 있었던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곳)는 홍제원 위로 옮기도록 했으며, 현재의 세검정이 있는 계곡과 그 위의 둔덕에 “봄에는 질탕하게 놀자”는 뜻의 탕춘대(蕩春臺)를 세웠다. 그가 왜 하필이면 이곳을 자신만을 위한 ‘질탕한 놀이터’로 만들었는지는 자명하다. 이곳의 산수가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영조는 홍상한에게 ‘연융대’ 바위글씨를 쓰게 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탕춘대의 규모와 화려함은 실로 혀를 내두를 만하다. 현재 세검정이 있는 지역 일대를 항공사진으로 내려다보면 북한산의 문수봉과 보현봉 즈음에서 발원한 홍제천이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휘돌아 나간다. 이른바 ‘물도리동’인 것이다. 연산군의 탕춘대 중 일부인 탕춘정은 이 물도리동 위의 제법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듯하다(1506). 현재는 월드캐슬 빌라 정문 초입의 암벽 밑에 ‘탕춘대터’라는 표석이 남아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1506)으로 폐위된 이후 한 동안 ‘잊혀진 땅’으로 남아있던 이곳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의 일이다. 북한산성을 완성한 숙종은 이 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깨닫고 다시 서성(西城)을 쌓기 시작한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성이다. 이 지역에 오래 전에 탕춘대가 있었기에 흔히들 ‘탕춘대성’이라 부른다. 현재에도 향로봉 하단에서 인왕산까지 연결된 탕춘대성이 남아있다. 이 성과 홍제천이 만나는 지역에 홍지문과 오간수문이 세워져 있다. 민간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이 즈음부터이다.

한양도성의 북방 경계를 맡고 있던 군대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영조다. 현재의 동명 신영동(新營洞)은 바로 ‘군부대가 새롭게 주둔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영조는 1754년 가을에 “탕춘대라는 이름은 어감이 좋지 않으니 이 지역을 연융대(鍊戎臺)라고 고쳐 부르라”면서 당시 소공동에 살던 홍상서(洪上書)에게 글을 써서 바위에 새겨놓으라 했다. 이 ‘홍상서’라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를 특정할 수 있게 된 것이 이번 인문산행에서 거둔 중요한 성과들 중의 하나다.

홍상서는 홍상한(洪象漢, 1701~1769)이다.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며 어유봉의 문인이자 사위였던 그는 1754년 당시 예조판서로 재직 중이었다. 그에게 내려진 시호가 정혜(靖惠)였던 까닭에 [정혜공유고]라는 저서를 남겼다. 홍상한의 증손자인 홍석주의 문집 [연천집]에는 저간의 사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홍상한이 연융대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바위에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겸재 정선의 [계상아회도]를 보면 연융대 바위글씨가 어디쯤 새겨져 있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정조 시대를 통과하면서 이곳 세검정 일대는 한양도성 안 사람들에게 최고의 유상처로 떠오른다. 정조 역시 신하들을 이끌고 연융대에 올라 활쏘기 시범을 보인 후 세검정에 들러 영조의 어제시 현판을 보고 이를 차운(次韻)해 시를 짓기도 했다. 송상기의 [유북한기]나 이덕무의 [기유북한] 등 조선 후기의 북한산 유산기들을 보면 세검정이 출발지 혹은 필수경유코스로 빈번히 언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가 오면 말을 달려 세검정으로 놀러가자”

세검정 혹은 탕춘대 일대를 대상으로 하는 온갖 산수유기(山水遊記)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세검정기]다. 그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세검정으로 물놀이를 하러 갔던 기록인데 읽는 내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신해년(1791) 어느 여름날, (중략) 술잔이 돌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으로 까맣게 변하더니 천둥과 번개가 우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술병을 차고 벌떡 일어나 말했다. "폭우가 쏟아질 징조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나?"

현재의 세검정 일대는 온갖 도로들과 터널들이 난무하는 도심의 공간이다. 하지만 예전의 이곳은 도성 밖의 한갓진 곳이요 외따로 떨어진 막힌 계곡이었다. 북한산과 백악으로 떨어진 빗줄기는 고스란히 이곳 홍제천을 따라 세찬 물줄기를 이룰 수밖에 없다. [동국여지비고]는 “장마가 지면 해마다 도성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했다”고 전한다. 정약용 역시 이러한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기에 천둥 번개가 울리자마자 술친구들을 이끌고 세검정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말을 달려 세검정에 이르니 수문 좌우 계곡에서는 암고래, 숫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 했고, 옷소매 역시 빗방울로 얼룩덜룩해졌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으니 난간 앞의 나무들은 이미 미친 듯 나부끼고 빗방울로 한기가 뼈에 스몄다. (중략) 대동한 하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니 농지거리가 질탕하게 일어났다. (중략) 저녁 해가 나무 사이에 걸려 울긋불긋 온갖 광경을 연출했다.”

내가 웃은 것은 ‘비가 오니까 술 마시다말고 물구경 하러간다’는 대목에서였다. 여기서 물구경이란 비구경, 계곡구경, 폭포구경 등을 뜻한다. 나 역시 폭우가 예보되거나 실제로 폭우가 내리는 날이면 산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서울시내나 인근에는 볼만한 폭포가 없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나 그 다음 날이면 근사한 장관을 선사해준다. 내가 즐겨 찾는 물구경 명소는 북한산 구천은폭, 관악산 문원폭포, 그리고 수락산의 은류폭포나 문암폭포다. 제주도에 산다면 당연히 엉또폭포를 보러갈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들이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노무현 탄핵사건이 준 뜻밖의 선물

노무현 탄핵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2004년 3월 12일의 일이다. 이때부터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릴 때까지, 대통령 노무현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 매일 백악 기슭을 쏘다녔다. 어느 날 그는 백악의 한양도성을 넘어 지금의 신영동 부근에 이르렀는데 뜻밖에도 매우 아름다운 유적지와 마주치게 된다. 그때까지도 ‘청와대 경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던 지역이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돌아보게 될 백석동천 지역이다.

장의사, 조지서, 세검정, 탕춘대, 석경루 등에 대하여 하염없이 수다를 떨고 갑론을박하던 일행들은 이제 백석동천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한다. 최근에 지은 신영정(新營亭)에서 현통사를 거쳐 백악의 북쪽 산자락으로 붙는 길이다. 조금만 고도를 높여도 자문밖의 승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한산 향로봉에서 흘러내린 탕춘대성과 건너편의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윽고 호젓한 산길을 한 굽이 돌아들면 이내 넓디넓은 별서정원터가 거짓말처럼 펼쳐진다. 흡사 남도 어느 깊은 산 속의 그윽하고 쓸쓸한 폐사지에 와 있는 느낌이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탄핵 심사 중의 대통령’ 노무현은 당시의 문화재청장 유홍준을 불러 말한다. “내 이곳을 청와대 경호구역에서 해제하여 문화재청에 넘겨줄 테니, 당신은 이곳의 연원과 문화유적을 잘 연구하여 서울시민들에게 개방하시오.” 덕분에 이곳은 서울시민 아니 대한민국 국민의 향유지가 되었다. 노무현의 업적들 중 특히 우리 ‘산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백악의 한양도성 구간 개방, 인왕산 자락의 수성동 개방, 백악 자락의 백석동천 개방.

아무리 청와대 경호구역 안에 있었다 할지라도 ‘없던 곳’이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이곳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백사실 계곡’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잘못된 구전(口傳)이 널리 퍼져 있었다. 바로 “백사 이항복이 주로 이곳에 와서 노닐었기 때문에 그의 호를 따서 백사실 계곡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의뢰를 받아 이곳을 연구조사한 학자들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사실을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이곳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별서였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백석동천의 주인은 누구인가

현재 백석동천을 구성하고 있는 유물들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일단 별서터를 중심으로 보면 크게 보아 두 개의 초석군(礎石群)이 있다. 하나는 ‘ㄱ’자 모양의 사랑채와 그 북쪽의 안채 그리고 주변 부속시설로 이루어진 초석군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남쪽에 타원형의 연못이 있고, 연못 남쪽 측면에 육각정자(일명 백석정)로 이루어진 초석군이다. 여기에 덧붙여 ‘백석동천’과 ‘월암’이라는 바위글씨가 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매우 아늑하고 고즈넉한 공간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막상 전망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망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그만큼 백악의 북쪽 기슭에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폭 싸여있는 숨겨진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초석군의 규모와 분포로 볼 때 매우 웅장하고 품위 있는 별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양도성을 살짝 벗어난 이 비밀의 공간에 이 정도 규모의 별서를 짓고 소유했던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일단 백사 이항복은 이 공간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대부분의 백석동천 관련논문에서는 허필(1709~1761)을 한때의 주인으로 본다. 그는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살았던 문인이자 서화가로서 강세황의 절친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한국산서회 인문산행팀은 이러한 주장의 논거가 매우 빈약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광려(1720~1783)와 박규수(1807~1876)의 시에서 이곳의 주인인 듯 묘사한 ‘허씨’ 혹은 ‘허진인’이 혹시 미수 허목(1595~1682)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지만 이 역시 명확한 논거를 대기 힘들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보다 깊은 연구와 고증이 필요할 듯하다.

추사 김정희가 한때 이곳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은 2012년 문화재청 소속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식발표한 내용이다. 추사가 북서(北墅)라고 표현한 이곳을 우리는 실제로 그의 부친 김노경이 소유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추사도 자주 드나들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현재 과천의 추사박물관 앞에 재현해놓은 ‘과지초당’이, 어쩌면 이곳 백석정을 일컫는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기도 한다. 추사의 시 [가을날 과지초당에 거듭 이르다] 중에서 제3행 “삼봉 빛은 반가이 맞이해주고(款款三峯色)”의 삼봉이 혹시 삼각산(북한산)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보다 깊은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

추사 이후 이곳의 주인은 애사 홍우길(1809~1890)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주장이다. 조면호가 당대의 예조판서 홍우길이 백석실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백석동천을 방문하여 쓴 시를 보면 이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백석동천 혹은 백석실은 그렇게 유구한 세월을 돌고 돌아 현재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참가자들은 백석동천의 초석군 및 그 주변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봄날의 햇볕을 만끽하며 조촐하고 소박한 점심식사를 한다. 시간이 제법 흘렀건만 아무도 먼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아름다운 봄날의 소풍이다.

 

자하문을 통과하여 인왕산 청풍계를 향하여

세검정과 백석동천에서 너무 오래 지체한 탓에 점심을 마치고 일어서니 오후도 많이 기울었다. 능금마을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 아랫길을 따라 자하문 쪽으로 나아간다. 예로부터 서울의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는 두 가지를 손꼽았다. 하나는 홍릉수목원의 복수초요, 다른 하나는 백석동천의 도롱뇽이다. 과연 능금마을 아래 계곡에는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오는 도롱뇽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과연 봄이 오긴 온 것이다.

능금마을의 유래를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조선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능금을 심기 시작한 데서 마을의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해설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능금을 들여왔을까? 바로 지난 번 인문산행 송계별업의 주인공 인평대군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선에는 토종 사과가 있었다. 인평대군은 중국산 능금의 씨를 가져와 이곳에 심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는 마을 이름이 무색하게 능금나무 한 그루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흙길을 벗어나 아스팔트길로 접할 즈음 어디선가 눈에 익은 멋진 양옥 별장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박범신 원작의 장편소설을 정지우가 각색하여 영화로 만든 [은교]의 촬영지이다. 홍상한이니 홍우길이니 낯선 인명들(?)에 치여 조용했던 참가자들이 돌연 눈빛을 빛내며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역시 인문학의 시대는 저물고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자하문까지는 백악의 소문난 능선이다. 걷는 내내 오른쪽으로는 북한산이, 저 건너편으로는 인왕산이, 바로 왼쪽 머리 위로는 백악이 그 멋진 산세를 뽐내며 도열한다.

자하문은 백악과 인왕의 경계선이다. 인조반정의 무리들이 홍제원에서 모여 한양도성으로 치고 들어갈 때 통과한 문이 바로 이 자하문이다. 자하문을 통과하여 인왕산으로 붙자 제일 먼저 일행들을 반기는 것은 윤동주문학관이다. 바로 위에는 ‘윤동주 영혼의 터’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일행들은 모처럼 윤동주의 시를 읊조리고, 발아래 펼쳐진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새삼 우리에게 산이란 무엇인가를 되짚어 본다.

잠시 숨을 고른 일행은 이제 인왕산의 심장이자 가장 깊숙한 계곡인 ‘청풍계’의 상단을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단언컨대 청풍계야말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사상과 문학예술의 진원지’이다. 이 놀랍고 기념비적인 장소에 그를 기리는 팻말 하나 없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무지요 치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청풍계에 다다르자 조장빈의 열띤 강의가 다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갈 길이 멀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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