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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이 만난 마지막 휴먼 알피니스트

 

뚝심으로

한국 산악문화를 일궈 온 홍석하

· 신영철 편집주간

사진 · 정종원 기자

 

사람들은 묻는다. 휴먼 알피니스트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거냐고. 오랜 기간 <사람과 산>에 연재하며 단행본으로도 엮어진 「휴먼 알피니스트」에서 나는 무얼 주장했던가? 머리 쥐나는 철학이 다. 그렇지만 말랑한 휴머니즘 역시 정의가 복잡하다. 이어령비어령 종합적 해석이기 때문에 많은 이견들이 존재한다. 단순화가 필요했다. 난 알피니스트가 산을 바라보는 성찰을 중요시했고 그 점을 강조했다. 산을 해석하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고 배워왔던 것이다.

 

이 시대 마지막 휴먼 알피니스트

2018년 5월 28일, 요세미티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시차 때문에 뒤척이다 텐트 밖으로 나서니 하늘에선 별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드르륵 울렸고 문자가 떴다. 29일 홍석하형님 별세. 발인은 31일 삼성병원. 옵니까? 후배의 연락이었다. 하루가 느린 미국이지만 동시간에 석하형의 부음을 알았다. 갑자기 영롱했던 하늘의 별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막막해졌다.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무언가 많이 억울했다. 요세미티에 오기 전, 마지막 병문안에서 형과 나누었던 말이 깨진 사금파리마냥 두서없이 떠올랐다. 형의 나이 이제 겨우 일흔 한 살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이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변 모두가 알고 있었듯 석하형도 자신의 몰(沒)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입·퇴원을 거듭하는 힘겨운 싸움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출국을 앞두고 형이 입원한 한국 최고라는 병원을 찾았다. 형과의 대화 중에서 조금은 더 버텨낼 수 있을 것에 희망을 보았다. 죽음은 멀리 있다고 믿었기에 전혀 음습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므로. 내일 미국 갑니다. 5월 요세미티 폭포의 파워가 장관이거든요. 그래? 사진 잘 찍어 근사한 꼭지 하나 만들어라. 울주세계산악영화제는 산악문화상 수상자가 결정되었다면서요? 그래. 우리가 연전에 강연회도 열어 준 크리스 보닝턴이 올해의 수상자로 확정되었다. 잘 되었네요. 형은 그 산악문화상 선정위원이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가벼운 일상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그 상황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회사걱정. 형이 맡은 트레킹지원센터 이사장 역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그리고 남들 뒷담화까지. 갈게요. 잘 갔다 와라. 미국가면 선후배들에게 안부 전하고.

깨진 파편처럼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 사이 사위의 고요는 더 가라앉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 올려다 보이는 별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나무 등걸에 기대었다. 형이 부탁했던 안부라…. 어떤 안부를 누구에게 전할까. 미국 비자 얻기가 쉽지 않던 시절, 당신이 보증을 서서 보낸 후배가 이 미국에는 많았다. 그들 역시 항상 의리를 강조한 형의 닮은꼴이었다. 형을 따랐던 추억이 각인되었으므로 회사가 어려운 때 기꺼이 후원금을 보내 주기도 했다. 마지막 병문안에서 전하라는 안부는 형이 그들에 대한 이승에서의 고별 인사였을까. 눈부시게 푸르른 5월, 석하형이 짧고 굵은 삶을 접었다는 말도 안부가 되는 걸까?

오고 가는 게 인생이라지만 형 나이를 보면 억울한 건 맞다. 현실세계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살고 죽고 변화하고 있다는, 교과서적 금언이 떠올랐다. 물론 거기에 예외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등을 기댄 이 오래된 고목도 언젠가는 결국 사라질 것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기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자기변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임수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나지막이 석하형에게 말을 전했다. 먼저 가 계세요. 조금 더 있다 따라갈 테니.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불교진언을 위로처럼 읊조렸다.

 

홍석하는 클라이머였다

홍석하, 당신은 무엇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있소? 산악문화를 누리에 보급했던 전문잡지 <사람과 산> 발행인이요? 아님 클라이머 출신으로 불리고 싶소.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형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가상의 이런 물음에 나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클라이머로 불러 달랬을 거라고. 오래된 암벽장비와 한국 최고·최대의 피켈을 본사에 수집할 정도로 형은 벽(壁)을 사랑했던 인간이었다. 보성고교 시절 암벽을 시작한 석하형은 당대엔 손꼽히는 클라이머였다.

보성고등학교 산악반 OB모임인 보우회 시절, 형은 <파수대>라는 회보를 만들만큼 산악활동에 열정적이었다. 주변엔 걸출한 클라이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60년 대 말과 70년 대 초, 이들은 형의 거주지 삼선교를 근거지로 소위 ‘으리’로 똘똘 뭉쳤다. 일종의 조폭처럼 서열을 확실히 했고 형은 그 우두머리로 엄청난 카리스마를 뽐내던 때였다. 그 시절 인수봉과 선인봉은 석하형 삼선교파의 놀이터였으며 앞마당 역할을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형은 설악산 울산암 바윗길 개척에 열심이었다. 그러다 울산암에서의 운명적 추락은 형에게 바위사랑을 매몰차게 빼앗아 버렸다. 머리를 다치고 대 수술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형이었다. 그때부터 수술 후유증으로 살이 찌기 시작해 클라이머 생활을 접어야했다. 하지만 형을 점령한 골수 클라이머 생각은 버리거나 없앨 존재가 아니었다.

실례가 있다. 형은 <사람과 산> 자매지로 <클라이머>라는 클라이밍 전문잡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소수의 클라이머들을 위한 잡지 창간은 시대를 앞서간 모험이었다. 클라이머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속설이 맞는 건지 몰라도, 아무리 책을 잘 만들어도 팔리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붙듯 결국 재정이 건전했던 <사람과 산>까지 흔들리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형은 <클라이머>를 버리지 못했다. 폐간 대신 지금도 보고 있듯 <사람과 산>과 합본을 단행한 것이다. 이런 유사 사례는 많기도 하거니와, 형의 클라이밍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못할 짝사랑이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리하여 형의 등 푸르렀던 젊은 클라이머의 꿈과 DNA와 좌절이, 지금 <사람과 산>에 오롯이 녹아 있다.

오래 전, 휴먼 알피니스트 연재 때문에 미국 파타고니아 본사에서 이본 취나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인수봉에 취나드 길을 개척한 그와 인터뷰를 마치자 선물을 하나 꺼내 놓았다. 바로 자신이 대장간에서 직접 만든 ‘로스트애로우’라는 수제 하켄이었다. 귀국하여 그것을 선물했을 때 형은 그 큰 몸을 흔들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런 모습 역시 당신이 클라이밍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이동 코오롱 빙장에서 (주)안나푸르나와 매년 공동으로 개최하는 아이스클라이밍 대회 역시 클라이밍에 대한 석하형의 사랑을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석하형의 클라이밍에 대한 사랑은 개인의 짝사랑을 벗어나 아시아로 뻗어 나갔다. 알프스 지역에서 탄생한 황금피켈상에 주목한 형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직위원회로부터 위임받아 <사람과 산>은 ‘아시아황금피켈상’을 제정하여 지금도 창간기념일에 수여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상의 제정으로 아시아 각국의 산악전문잡지 관계자들과 세계 유명 산악인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의 산악계와 산악문화 발전에 놀라워하던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석하형의 지인들 거의가 동의할 부분이 하나 있다. 수십 년간 수없이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형의 소싯적 바위에서의 무용담을 지겹도록 반복해 들어야했다는 점이다. 클라이밍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열변가가 되었던 석하형.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까지 영원한 클라이머로 남고 싶었다고 나는 믿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남극탐험 대장

석하형의 의리와 카리스마에 얽힌 산악계 이야기는 참 많다. 지금도 많은 선·후배들이 형의 독특했던 ‘으리’와 보스 기질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경우에 벗어나는 일을 목격할 경우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다는 불같았던 저돌성.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집안이었기에 가끔은 ‘으리’로 사고를 치는 형의 뒤치다꺼리를 자주 감내했다는 추억.

형이 생전에 대화 중 즐겨 사용했던 말 중 ‘원형질’이란 단어가 있다. 말없는 형이, 잔머리와 말을 빙빙 돌려하는 것을 싫어했던 기질 때문인지 가식 없는 원형질을 좋아했다. 하긴 바위를 말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의 주변에는 패기 있는 클라이머들이 많이 모였다.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이 만든 카리스마의 원동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당시 석하형의 주 거주지가 삼선교였고, 그곳에 모이는 산악인들을 당시 산악계에선 ‘삼선교파’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던 1985년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석하형에겐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관운(官運)이 하늘에서 쏟아진 것이다. 그것도 덩굴째. 전두환 정권에서 국가가 파견하는 한국 최초의 남극관측탐험대가 조직되었다.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인 그 탐험대 총 대장으로 석하형이 선임된 것이다. 덩굴째라 함은 남극기지 건설 탐험은 물론, 최초의 남극대륙 최고봉 빈슨매시프(5140m) 등반대까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감생심 당대 산악인들에게는 남극은커녕 그 대륙 최고봉 도전은 꿈도 닿지 않을 아득한 공상이었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미지의 산을 오를 수 있다는 현실이 로또처럼 찾아 온 것이다. ‘으리’의 석하형이 허욱·허정식 등 삼선교파 후배들로 등반대를 꾸린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리고 신데렐라 동화처럼 온 국민의 환송과 기대를 받으며 지금도 아득한 남극으로 떠났다. 넉넉한 국가 예산으로 기지를 만들 관측탐험팀과 등반팀을 거느린 형은, LA를 거쳐 1985년 11월 16일 남극 대륙에 입성했다. 석하형은 남극대륙에 한국인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를 세울 수 있었다. 남극대륙에 3주간 머물며 과학적 탐사와 기지 부지를 조사하는 동안, 허욱·허정식 등의 등반대원은 빈슨매시프 정상을 성공적으로 오르고 무사히 귀환했다.

의리를 중시했던 단순한 산악인 석하형은 탐험 후 정치적 기대효과엔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저 탐험과 등반에 목마른 사람이라 대장이라는 중책을 기꺼이 맡은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성공적 탐험과 등반은 석하형의 상상 이상의 결과로 나타났다. 1986년 한국이 세계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하게 된다. 조약위원회로부터 홍대장의 이번 탐사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올림픽에 들떠 있던 1988년엔 석하형이 태극기를 세웠던 킹조지 섬 베이스캠프에 한국 최초의 남극기지 세종과학기지가 세워졌다. 그때의 탐험이 시발점이 되어 지금도 한국의 적극적인 남극 진출로 이어지고 있다. 알았든 몰랐든 석하형의 이런 선구자적 탐험의 결과는 참으로 웅대했다. 지금은 남극 2곳, 북극 1곳의 과학기지와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까지 갖춘 극지 강국을 만들 수 있었던 첫 단추였던 것이다. 이런 공로를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석하형은 국민훈장 동백장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런 분에 넘치는 서훈(敍勳) 역시 우직했던 형이 기대했을 것 같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형은 마지막까지 사단법인 한국극지연구진흥회 이사직도 놓지 않고 있었다.

 

홍석하와 <사람과 산>의 아름다운 동행

석하형이 책과 인연이 깊었고 더불어 욕심이 많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형이, 독서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건 잘 모르겠으나 책에, 유난히 산서(山書)에 욕심이 많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다. 70년대부터 소위 삼선교파 리더였던 형은 그 시절 「산악사전」을 기획했다.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사전’ 편찬은 출판의 꽃이다. 그만큼 어렵고 방대한 작업이 수반되는 일이다. 여러 사정 때문에 출간하지는 못 했으나 마지막인 올해까지 장장 50년 기획이었고 원본이 지금도 살아 있는 미완의 장서였다.

책에 대한 이런 욕심은 석하형이 큰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큰 형은 석하형이 세 살이던 1945년 ‘탐구당’이라는 출판사를 창업했다. 탐구당이 한국을 대표하는 굴지의 출판사로 커가는 것을 보며 성장했기에 소싯적부터 책의 중요성과 영향을 형은 알았을 것이다.

<사람과 산>이 창간된 1989년만 하더라도 올림픽에 힘입어 막 산악문화가 피어나기 시작한 때였다. 바위에서 추락 후 산악계 현역에서 떠난 형은 그 에너지를 산악문화 쪽으로 돌렸다. 1990년 12월, 경영이 어려웠던 <사람과 산> 사장에 취임한 형은 이때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때 맞춰 사업운도 따랐다. 등산 붐이 일었고, 경제가 활황이었으며, 따라서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했던 산악인들은 <사람과 산>의 진보적 편집에 열광했다.

특히 본지가 캠페인을 시작한, 그 당시로는 생소했던 ‘백두대간’론이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백두대간을 축으로 자발적으로 전국 네트워크가 결성되는가 하면 종주 붐이 일기 시작했다. 중앙방송까지 주목하여 <사람과 산>이 주창한 대간론에 기름을 부어 넣었다. 그런 일련의 흐름을 곰곰 살펴보면 석하형의 고집이 그 바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땅에 백두대간을 고유명사화 시킨 형의 고집 역시 소문나 있다. 보급용 백두대간 지도를 처음 만들어 양산해 낸 것도 형이었다.

<사람과 산>은 내년이면 스스로 우뚝 선다는 이립(而立)을 맞는 창간 30주년이다. 그런 오랜 세월동안 <사람과 산>은 매달, 악착같이 백두대간과 정맥을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진보를 거듭한 백두대간은 스스로 과학을 만났다. 국토지리원의 과학적 지도와 함께 위성에 힘입어 이제 GPS를 활용한 정확한 지도까지 제작하여 세상에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시에 석하형은 스스로 백두대간 복원에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안고 정면으로 나섰다.

산경표를 발굴한 고(故)이우형씨와 함께 전국을 돌며 백두대간 전국순회 강연회를 개최했다. 스스로 백두대간 전도사를 자임한 형은 사재를 털어 무료 전국순회 강연을 통하여 백두대간을 알렸다. 그런 노력이 시나브로 산악계 전반에 스며들어 이제 백두대간 종주 산악인이 수십 만명을 넘어선 괄목할 사변을 만들어 냈다. 그 놀라운 효과에 따라 당연히 백두대간 보존을 위한 환경운동도 나타났다. 급기야는 국회에서 백두대간 보호법이 만들어졌다. 이제 지리교과서에도 산경표와 백두대간이 수록되는 큰일을 <사람과 산>이 이뤄냈던 것이다.

사실 전문잡지는 회사 운영이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사람과 산>이 흥망을 거듭했던 등산전문잡지에서 살아남아 우뚝 선 배경엔 석하형의 고집과 뚝심과 독자들의 사랑이 있었다. 독자들은 이런 석하형의 노력이 활자와 사진으로 연재되는 것을 보며 기꺼이 힘이 되어 주었다. 이렇듯 창간 후 지금까지 악착같이 이어 온 석하형의 고집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산악계의 커다란 족적으로 남았다.

나는 석하형의 제안에 따라 낙동정맥을 처음으로 종주한 추억이 있다. <사람과 산>에 처음 하는 낙동정맥 종주기를 연재한 기록은, 생각해 보니 석하형이 나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라는 생각이다. 낙동정맥 끝자락인 부산 금정산에, 지금은 국립공원 관리공단 이사장이 된 권경업 시인과 함께 도착했을 때였다. 금정산 정상에는 석하형이 플랜카드를 걸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전국에서 모였던 산악인들 수십 명이 형을 따라 다니며 흩어지지 않자, 식당을 전세 내어 바가지를 쓴 기억도 있다. 그때도, 그리고 마지막에도 형이 말했지만,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백두대간이란 이름을 되찾고 이를 전파시킨 것”이라는 믿음을 나도 믿는 것이다.

석하형의 이런 산악문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고집스러웠던 후원은, 여러 부분에서 후광을 만들어 낸다. 남극 탐험이 그랬듯이. 문화는 스스로 복제하고 창조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다만 누군가 시작을 해 놓아야 한다. 그리하면 스스로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른다. 백두대간 역시 그렇다. 산악계에서는 드문 스테디셀러도 만들어 졌다. 「산경표를 위하여」 , 「태백산맥은 없다」 등이 그 효과일 텐데, 유행처럼 번진 백두대간 종주 붐의 후광으로 종주기가 수십 권 양산되는 효과도 나타났다. 일 년에 산서(山書) 한 권 나오기가 힘들었던 예전에 비하면 산악문화의 저변은 확실하게 넓어진 것이다.

형의 책 사랑은 <사람과 산>의 단행본 발간 사업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남들이 피해가는 산서(山書)를 손해를 보면서도 기꺼이 펴낸 것이 이제 수백 권이다. 우직스러운 고집과 뚝심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단행본 발간이었다. 이렇듯 사업상 돈은 되지 않았으나, 형의 고집은 산악문화에 많은 부분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형의 산서(山書) 사랑을 나타내는 모임이 있다. 일회용이 아닌 평생의 책사랑 하나를 알 수 있는 사례로 ‘한국산서회’ 발기를 들 수 있다. 회장을 역임하며 지금도 매년 펴내고 있는 연감 발간에도 형은 기꺼이 발 벗고 나섰다. 산서에 대한 사랑은, 이미 수집한 많은 분량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서가였던 형이 소장한 수많은 산악 관련 저서와 희귀본들은 생전 책 사랑의 진수를 보여준 증거라 할 수 있다.

 

등산문화에 남긴 커다란 발자취

형의 분신이었던 <사람과 산>이 한국 산악문화를 꽃 피우는데 기여를 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만큼 <사람과 산>의 위상도 높아졌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역대대통령 후보들을 독점 인터뷰하는 관례도 형이 만든 작품이었다. 산악계를 대변하여 그들의 산악관을 알아본 일도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들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 역시 기록할 만한 형의 선행으로 기억된다.

산악계를 위하여, 산악문화를 위하여 <사람과 산>이 제정한 상의 종류도 다양하다. 상의 숫자도 많았다. 창간기념식에서 빼놓지 않고 시상되었던 상은 종류가 다양했다. 한국산악문학상·환경대상·탐험대상·황금피켈상·골든슈즈상 등 <사람과 산>이 아니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이벤트였다. 괄목할만한 클라이밍을 해낸 산악인을 발굴하여 시상하는 골든슈즈상도 형의 클라이밍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런 시상을 통하여 가슴으로만 품었던 산을 산악문화라는 형상으로 구체화시켰고 전문 산악지도자를 양성시킬 수 있었다.

그것뿐일까. 형은 이탈리아 트렌토 산악영화제와 결연을 맺고 해마다 첨단의 산악영화를 국내에서 무료로 상영했다. 형의 산악문화에 대한 집념은 책뿐 아니라 산악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하며 확실한 기여로 나타났다. 지금 확실하게 자리 잡은 ‘울주세계산악영화제’의 아이디어도 트렌토 산악영화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산악영화상영회, 산노래 보급, 산사진 콘테스트, 산책 전시회 등 문화 쪽 행사는 물론 백두대간 토론회, 세계유명산악인 초청 강연회, 산악관련 심포지엄 등, 돈 안 되는 기획도 형의 우직한 고집 때문에 명맥을 이어왔다. 이렇듯 형은 <사람과 산>의 수익금을 산악문화를 위해 기꺼이 투자해 왔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인정하는 부분이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판가름 난다고들 말한다. 석하형 생전 산악문화에 대한 투자와 기여를 모르는 산악계 선·후배들은 없다. 젊은 시절부터 목표를 세우면 밀고 나가는 저돌성과 고집과 배짱을 모르는 선배들도 없다. 고인이 된 직후 형만큼 ‘짧고 굵게’ 살았다고 평가를 받은 국내 산악인도 드물다. 고참이 된 전통 있는 한국산악회원으로서 산악문화에 광폭의 행동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형이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이젠 고인이 된 석하형은 행복했던 생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인연을 중시했던 석하형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두고 먼저 떠났다. 2018년 5월 31일 오전, 일산시 동구 성석동 고봉산 선영에서 깨어나지 않을 깊고 긴 잠에 들었다. 석하형을 챙겼던 선배들은 선배들대로, 따랐던 후배들은 그들대로, 그 자리에서 평생 형이 주장한 ‘으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평생지기인 석하형의 지인들은 고인을 추모한다. 남자다운 삶이 무엇인지 보여 준 일생이었다고. 홍석하는 짧고 굵게 살다간 휴먼알피니스트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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