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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문의 벽 _ 설악산 장군봉

 

옛 볼트를 손보며 바위에 새겨진 선율을 느끼다

글 · 최석문(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사진 · 주민욱 기자

 

설악산 장군봉 ‘90(구공)길’ 보수를 8월 2일 금요일로 정한 것은 등반자나 금강굴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휴가철이라 주차장 도착 전부터 차량이 길게 줄을 서 있다.

국립공원에 근무했던 지인을 통해 사전에 공단에 보수 계획을 알리니 차량을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사전에 협조 요청을 하면 혹 발생할 수 있는 낙석 사고를 막고 원활한 보수 작업을 위해 암장 통제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무거운 보수 장비와 등반 장비를 매고 걸어야 하는 수고로움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우리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비선대 산장이 있던 자리는 무성한 풀이 대신했다. 오래 전 산장 침상에 누워 바라보던 장군봉과 적벽은 거벽과 히말라야를 꿈꾸게 했다. 설악에 오면 당연한 듯 베이스캠프가 되었던 비선대 산장이 2015년 철거되면서 많은 산악인들의 마음 한 켠에 자리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산장의 문화를 모르는 청년 등반가들은 무심히 지나간다. 지난날 우리가 누렸던 많은 것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큰 혜택이었다. 비선대 산장, 저항령 야영장 등 우리 곁에 항상 있는 줄만 알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우리가 지키지 못했든, 지킬 수 없는 대상이였든, 후배들은 이러한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 그저 미안할 뿐이다.

 

하강 루트로 만들어졌다가 등반 루트로 개척된 길

철다리를 건너 마등령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토막골의 시원한 물소리를 기억해둔다. 이제부터 가파른 돌계단, 이내 옷은 땀에 젖어버렸다. 벽 밑까지 한 번에 오르던 길이지만, 땀도 식힐 겸 금강굴 갈림길에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폐쇄되어 장군봉 남서벽 루트들을 등반할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등반가들의 열정과 도전이 배기기를 기대해본다.  

90(구공)길은 전준수, 이종길, 김광수 선배에 의해 개척되었다. 루트의 이름은 90년에 개척되어 붙여졌다. 90(구공)길 개척 이전에는 기존길 등반 후 하강을 금강굴 왼쪽으로 했는데 로프가 암각에 걸리는 등 불편함은 컸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90길은 처음에 하강 루트로 만들어졌다가 이후 등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1990년 봄부터 3개월에 걸쳐 개척되었다.

이 루트는 95년 아이거북벽에서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전준수 선배가 루트 개척을 주도했다. 이종길, 김광수 선배가 함께 참여했다. 90(구공)길에 박힌 특이한 형태의 볼트는 당시 미국에서 이종길 선배가 구입한 볼트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사용된 점이 특이하다.

 고 전준수 선배는 인수봉 대슬랩 좌측에 오이지 슬랩의 개척자로 익히 들었지만 단지 슬랩 난이도가 오이지 같이 짜다는 표현의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수 내용을 SNS에 올렸더니 누군가 그와 있었던 옛날 일화를 답글로 남겨주었다. 오이지는 Original Elegance Gentleman을 줄인 것이지 슬랩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리볼팅 제안은 개척자와 인연이 있는 장형원씨와 구공길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 문성욱씨가 했다. 장형원씨는 이종길 선배에게 루트 보수에 대해 의견을 전달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는 전준수 선배의 마지막 등반인 아이거 북벽에서 함께했고 친동생과 같은 신문희씨를 아이거북벽에서 잃은 아픔이 있다.

문성욱씨가 잊고 있던 보수 작업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지난 7월 이 루트를 다시 등반하고 나서였다. 필자는 지난번 고생스러웠던 미륵장군봉이 떠올라 선선한 가을에 하자는 의견이였지만 그는 빠른 시일에 해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모든 루트는 자신만의 운명을 갖는다

출발 지점 앞에서 장비를 챙기는 필자에게 문성욱씨가 말을 건넨다.

“석문아, 하네스 가져왔니?”

“그럼요 다른 건 가지고 오지 않아도 하네스는 가져와야죠!”

지난 7월 7일, 미륵장군봉의 카르마(5.11c, 4피치, 타이탄 산악회 개척) 보수 작업 때 하네스를 가져 오지 않아 10mm 슬링으로 벨트를 만들었다. 모든 볼트 작업을 마치고 하강할 때는 올가미에 걸린 동물들의 고통이 떠올랐다. 얇은 슬링이 살을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며칠이 지나고서야 자국이 사라졌다.

8월의 태양이 바위를 달군 지 오래다. 초크를 바르고 홀드를 잡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몇 년 전 등반해 봤다지만 기억도 못할 뿐더러 필자는 루트에 대해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습관도 있다. 그래야 다시 찾는 길도 온사이트 느낌으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암벽등반에서 온사이트라는 의미는 가장 흥미진진한 일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스스로 판단하여 오른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며 성공과 실패는 부차적인 것이다. 루트를 외워서 등반하는 것은 새로운 길을 가는데 주저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새로운 루트를 개척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90(구공)길 출발은 금강굴 조금 못 미처 우측 기정길(5.11c, 5 피치, 93년 최승철 개척) 동판이 있는 곳에서 한다. 기정길 출발 지점에 새롭게 추가된 볼트에 알파인드로우로 길게 연결하고 첫 번째 볼트에 클립 하든지 아니면 이곳에서 확보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첫 피치는 특정 부분이 어렵다기보다는 지속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등반 거리는 30m 정도로 7개의 볼트가 있으며 5번째에서 6번째 볼트 거리가 멀어 부담스럽다는 의견을 가진 등반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중간 부분에 캠 설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전할 사람들을 존중해 볼트를 추가하지 않았다.

모든 등반은 위험하다. 위험의 판단 기준은 주관적이어서 각자가 판단하고 결정하면 된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가지 않으면 되고, 등반을 하면 스스로 책임지면 된다. 등반선이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위험한 루트들은 찾는 이가 적어 자연스레 평가 받기 마련이다. 6번째 볼트 클립 후 7번째 볼트를 갈 때 좌측의 플레이크를 이용해도 좋으나 직상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등반 난도는 조금 상향된 5.11a 정도다. 수직의 벽에 끊어질 듯하다 다시 연결되는 조각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선은 감명 그 자체다. 그리고 멀찍멀찍한 볼트는 긴장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개척자들이 많은 등반과 고민 후에 볼트 위치와 수를 결정한 듯 보인다. 필자는 90(구공)길의 1피치를 한국에서 손꼽을 뛰어난 페이스 루트로 본다. 단언컨대 자연만이 이러한 등반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피치는 첫 볼트가 우측으로 치우쳐 있어 로프의 흐름이나 등반선을 감안해 좌측으로 조금 내려 설치했다. 물론 긴장감은 훨씬 줄어들었지만 한결 부담 없이 등반이 가능해졌다. 보수 작업 당시 2피치 4번째 볼트가 개척 당시의 볼트와 달라 의문이 들었다. ‘Climb’이라는 알루미늄 행거의 상표를 봐서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으로 초반에 보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보수 당일에 보지 못했고, 8월 10일에 발견했다.

오리지널 루트는 3번째 볼트에서 우측으로 진행해 4번째 볼트 클립 후 수평크랙을 따라 좌측 확보 지점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이전 보수 시 로프 꺾임으로 등반선을 직선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오리지널 루트를 오를 때는 로프 유통에 주의하면 될 듯하다. 2피치 난도는 5.10c이다.

3피치는 현재 제작된 루트 정보를 보면 짧게 25m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 3피치 등반 길이는 50m 정도로 예상된다. ‘나의 소중한 사랑 10월 1일생(5.12a, 8피치, 1997년 엄지훈·안종능 개척)’ 6피치와 만나는 지점이 3피치로 알려져 있는데 개척자가 사용했던 볼트는 이곳에 없었다. 등반 길이가 부담스러울 경우 선택적 확보지점으로 사용하면 좋을 듯하다. ‘10월 1일생’ 확보 지점 좌측 크랙을 따라 20m 정도를 곧장 오른 후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턱을 넘으면 소나무가 있는 좋은 테라스가 3피치이다. 페이스, 슬랩에만 볼트가 4개 있으며 크랙에는 볼트가 없다. 난도는 출발지점이 5.10d이고 크랙은 5.8이다.

마지막 피치, 4피치는 50m 정도로 침니를 넘어 쉬운 크랙선을 따라 오르면 된다. 등반 난도는 5.9로 어렵지는 않으나 로프유통에 주의해야 한다.

 

루트 개척의 교과서, 90길

필자는 선배님들이 설치해 놓은 볼트를 마지막으로 사용하며 오르는 내내 한 편의 시처럼 바위에 새겨진 선율을 느낄 수 있었다. 90(구공)길의 등반선을 발견하고 연결한 선배들의 안목과 절제된 볼트 설치는 등반 루트의 교과서이며 많은 등반가들이 꼭 올라 보아야 할 루트라 생각한다.

 

‘8월 2일 금요일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날, 벽은 발바닥이 따가울 정도로 뜨겁다. 아침 9시에 시작한 일은 오후 6시에 마무리했다. 땀이 비 오듯 하며 목은 바싹바싹 마르고 입에서 단내가 난다. 문성욱, 최석문 두 사람이 설악산 장군봉에 있는 90길 전 구간 노후 볼트 교체 작업을 하고 나는 시등을 해봤다. 선배들의 안목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명희.

 

“몸은 힘들고 피곤해도 그간 미뤄둔 숙제를 해결하니 이제야 마음이 홀가분하다.”

왜 문성욱씨가 이 길에 대한 애정을 가졌는지 등반을 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루트를 개척한 지 30년이 되었다. 많은 등반가들이 올랐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등반가들이 이 루트를 찾을 것이다. 보수를 하면서 개척자의 볼트 흔적은 모든 피치마다 하나씩 남겨 두었다. 녹슨 볼트 속에 감추어진 개척자의 열정을 없앨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가을에는 장형원씨와 함께 꼭 이 길을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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